Ⅰ. 여는 글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논리실증주의에 반대하며 등장했던 언어분석 철학은 현대 지성사의 유력한 흐름들 가운데 하나다. 비트겐슈타인부터 자크 데리다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언어분석 철학자들은, 철학의 문제를 언어 혼동에서 비롯된 언어 문제라고 진단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언어로 구성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한다.1) 물론 모두가 여기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주장은 너무 과도하고 극단적이며 시간관념을 도외시한다는 반발을 받고 있고, 언어가 실제 인간의 경험 및 사고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그들의 전제 역시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2)
전(前) 언어적 종교경험과 종교현상을 중요시하는 종교학 역시, 종교의 고유한 경험적 실증을 간과하고 종교와는 무관한 관념적 체계에 빠져있다는 이유로 언어분석 철학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다.3) 그러나 존 힉(Hick, J.)과 필립스(Phillips, D.Z.) 등 일련의 학자들은 언어분석 철학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종교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종교학의 영역 가운데 일부는 언어분석 철학의 다소 극단적인 주장을 수용한다는 얘기다. 사실 이들의 몇몇 주장들, 이를테면 특정 공동체의 고유한 언어는 독자적인 규칙을 가진 하나의 언어게임(Language Game)이고 지식 체계는 그 공동체의 지배 규범 특히 발화습관(언어)에 의해 축적된다는 것, 언어에서 채용되는 사유 형태는 곧 그 공동체의 특징적 사유 방식을 보여준다는 것,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특별한 양태들 안에 존재하는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이 진리를 포함한다는 것4) 등의 의견들은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종교공동체를 들여다보자. 이들은 자신의 특수한 경험을 진술할 때 독자적인 언어인 종교언어를 사용하고, 그 종교언어는 그 자체의 담론 구조 속에서 의미와 준거의 틀을 가지며 직접적ㆍ구체적ㆍ단일적인 사실보다는 우회적ㆍ추상적ㆍ초현실적인 다양한 사실과 의미를 포함한다.5) 그렇다면 종교연구의 핵심을 그 종교가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파헤치는 작업으로 간주하는 언어분석 철학의 관점은 간과되기 어렵다. 예컨대 선불교(禪佛敎)의 ‘산은 산이다’라는 명제를 살핀다고 할 때, 산이 왜 산인지를 탐구하는 것보다 그 명제 자체를 종교언어로 규정하고, 이에 포함된 ‘산’의 정체가 무엇인지 먼저 묻는 언어분석 철학의 접근법은 해당 명제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존 힉이나 필립스 외에도 종교언어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종교학자들은 여럿이다. 폴 틸리히는 종교 신앙이 그 상징을 담아낼 수 있는 종교언어로만 표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었고,6) 존 칼만도 한 종교의 경전을 번역할 때 특징적인 개념들은 번역이 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특정한 종교언어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던 것은7) 주지의 사실이다. 윌리엄 페이든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종교전통은 자신의 고유한 종교적 세계를 만든다는 것, 그 세계가 종교를 통해서 출현하도록 만드는 실제적인 방식(Actual Ways)은 곧 그 종교의 언어와 행위(Religious Language and Behavior)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종교언어와 종교행위는 그 종교가 어떤 실체를 드러낼 것인지 결정하고 종교 그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Religious World)를 주조한다는 것이다.8) 이 분석틀은 종교적 삶을 어떤 독립된 하나의 규범으로 환원시키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기술해 낼 수 있게 해주고, 여러 종교들을 구별시켜주면서도 동시에 전체를 연결하게 하는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종교연구에 있어서 상당히 유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9)
지금까지 다소 장황하게 언어 및 종교언어 이론들을 나열했던 이유는, 종교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사용하는 핵심 원소들 가운데 하나가 종교언어라는 것, 그에 대한 분석은 곧 그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작업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하자면 ‘종교언어를 분석하는 것만으로 어떻게 그 종교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을 막기 위해, 또 본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겠지만 ‘종교언어에 대한 잘못된 해설은 그 종교를 심대하게 오해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이와 같은 배경으로 해서, 대순진리회를 살피기 위한 종교연구 방법들 가운데 하나 역시 대순진리회의 종교언어를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표명하면서 대순사상에 접근한 학자들 중 대표적인 이는 최동희이다. 그는 신인조화나 해원상생 등을 종교언어로 규정하고 그것을 분석하는 방법으로써 대순진리회에 대한 이해를 도모했다.10) 필자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대순진리회의 세계를 형성하는 고유 종교언어들 가운데 하나인 ‘원시반본(原始返本)’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종교언어는 대순진리회가 구축하는 종교적 세계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아울러 대순진리회의 종교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종교적 행위, 특히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그 중요도가 높지만, 그동안 그 개념이 굴절ㆍ왜곡된 채 해설되어져 왔다11)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원시반본은 『전경』에서 다음 세 곳에 발견된다.
(A)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ㆍ풍신(風身)ㆍ풍골(風骨) 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나니라.12)
(B) 옛적에 신성(神聖)이 입극(立極)하여 성ㆍ웅(聖雄)을 겸비해 정치와 교화를 통제 관장(統制管掌)하였으되 중고 이래로 성과 웅이 바탕을 달리하여 정치와 교화가 갈렸으므로 마침내 여러 가지로 분파되어 진법(眞法)을 보지 못하게 되었느니라. 이제 원시반본(原始返本)이 되어 군사위(君師位)가 한 갈래로 되리라.13)
(C) 원시반본하는 때라 혈통줄이 바로잡혀 환부역조와 환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14)
이 종교언어는 (A)에서 시작ㆍ시초의 차원, (B)에서 정교일치의 차원, (C)에서 혈통의 차원으로 각각 사용되고 있다.15) 이것을 분석한 글들은 그동안 적지 않게 생산되어 왔기에, 더 이상의 연구는 불필요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순진리회의 입장에서 볼 때 기존 연구들은 반드시 재고(再考)되어져야 한다. 거의 모든 선행 연구들은 원시반본을 과거로의 복귀나 운도론적(運度論的) 순환사관(循環史觀)으로 설명하고 있고, 이러한 논의들은 상제의 진리 체계를 미증유(未曾有)로 규정하는16) 대순진리회의 입장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대순진리회가 원시반본에 대한 기존 연구들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대순진리회에서 원시반본이라는 종교언어가 구축해내는 종교적 세계는 과거를 답습한 산물에 불과하며, 상제의 인신강세(人身降世)와 천지공사도 미리 예정되어 있는 우주 변화의 수순에 따라 자연스레 일어난 일[運數에 있었던 일]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할 것이다. 대순진리회 세계관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이해는 대순사상을 심대하게 왜곡시키는 진원지가 될 수 있다. 대순사상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 원시반본에 대한 기존 연구들의 종합적 검토와 분석 및 교정(矯正)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글의 선행 연구로는 김탁(1993)과 김태수(2002)의 것이 있다. 그들은 원시반본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의견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검토하였는데,17) 그 대상은 주로 1990년대 이전의 연구들이었다. 이들의 연구를 비롯하여 1990년대 이후의 원시반본 연구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아직 이루어진 적이 없다. 따라서 이 글은 원시반본에 대한 그간의 모든 연구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유형화한 뒤 그 문제점들을 파악하고(Ⅱ장), 그것을 토대로 하여 원시반본에 대한 개념을 재설정할 것이다(Ⅲ장).
Ⅱ. 원시반본에 대한 기존 연구들
과거의 특정 장소나 시점에 성(聖)과 같은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그러한 과거로의 복귀 혹은 재현으로 원시반본을 규정하는 연구들부터 살펴보자. 이 연구들은 과거의 문물을 숭상하고 모범으로 삼는 상고주의(尙古主義)18) 또는 원형으로의 회귀를 강조하는 엘리아데식 종교문화 이해 방식19)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과거의 특정 시점이나 장소를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세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한국의 고유한 문화전통을 강조하여 단군을 과거의 복귀처로 삼는 입장이 있다. 그러니까 원시반본을 단군으로의 복귀 혹은 재현으로 이해하자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김형효(1979), 변찬린(1979), 윤태림(1980), 이항녕(1980, 1996, 1997, 2002), 배용덕(1982), 이을호(1983), 송호수(1983), 황정용(1991), 김홍철(1992), 배영기(1993), 김진(1998) 등에게서 볼 수 있다.20)
이 연구들의 대다수는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엽, 『증산사상연구』에 발표되었다. 『증산사상연구』는 증산진법회의 배용덕이 주도하여 편찬한 논문집이다. 여기에 실린 원고들은 대체로 단군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증산의 사상을 재편성한 증산교본부의 이정립, 그리고 증산계 교단 17개 종파가 참여한 증산교단통정원과 유사한 입장을 보여준다. 주지하듯이 이정립ㆍ배용덕 등은 단군과 수운을 계승한 존재가 증산이며, 그의 천지공사도 단군의 홍익인간ㆍ재세이화를 이은 것으로 규정했다.21) 이 해석은 상제의 사상을 편협하게 축소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으므로(김탁, 1993; 김태수, 2002)22),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술하지 않는다.
원시반본을 과거로의 복귀나 재현으로 보는 두 번째 경우는 유교적 문화전통에 입각하여 그 복귀처를 유교의 이상세계 모델인 요순시대로 상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김정태(1998)는 원시반본을 요순시대의 재현으로 보고 있다.23)이경원(2001, 2012)도 참된 이상세계의 원형은 요순시대에 있으니 이제 그것을 찾아서 과거의 이상으로 되돌아가고 과거의 성스러움[聖]을 회복하고자 함이 원시반본이자 개벽이라고 주장한다.24)김형기(2004)는 증산이 유교적 역사관으로써 이상적 사회상을 과거에서 찾았으며 그 옛날의 태평성대로 되돌리는 것을 원시반본이라고 보고 있다.25)장재진(2011) 역시 유불도 삼교 분리 이전의 원형으로 회귀ㆍ환원하는 것이 원시반본이며, 그것은 곧 태고의 이상세계 모델인 요순시대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6)
1990년대 말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한 이 연구들은 단군에 대한 언급을 자제함으로써 단군민족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였지만, 상제의 사상을 과거지향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문제점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김탁이 지적했던 대로, 상제께서 각 문화들의 정수(精髓)를 뽑아 새로운 후천 문명의 기초를 놓는다고 하셨던 말씀27)은 과거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와 제도, 특정한 사회를 지상선경의 원형으로 삼고 그곳으로 복귀하고자 하신 게 아님을 강력히 시사한다.28) 대순진리회 세계관으로 볼 때, 상제께서 열어놓으신 후천 지상선경은 상제의 공사에 의해 언어가 통일되고29) 전 세계의 종교ㆍ이념ㆍ문화의 정수가 뭉쳐져 하나의 단일한 문화를 이룬 곳이다.30) 그런데 선천에는 한 가지의 도(道)가 펼쳐졌고 후천에는 모든 도(道)가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31)는 상제의 말씀을 고려하면, 과거 선천에는 종교나 문화, 이념이 단일화되어 있었던 미분화 상태의 진리가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러한 단일 형태의 진리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원형적 전통(태고의 전통: Primordial Tradition)32) 같은 것일 터인데, 상제께서 세우신 진리가 미증유하며 유일무이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 대순진리회의 관점이라면33) 상제께서 후천 문명의 기초를 세우시기 위하여 각 종교와 문화의 정수를 걷어 새로 만들어내신 진리는 선천의 그 진리와는 다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대순사상의 입장이라고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따라서 행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느니라.”34)는 상제의 말씀은 그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순사상은 상제께서 이 땅에 펼치신 상생대도가 유일무이한 진리이고, 천지공사는 운수에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니며, 천지공사의 결과물인 개벽과 후천 지상선경은 미증유의 것이라고 규정한다는 말이다.
대순진리회는 상제께서 만드신 개벽을 선천의 개벽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본다. 개벽이란 원래 급격한 변화를 일컫는 개념이지만, 대순사상에서의 개벽은 그보다 훨씬 더 급격하다. 예컨대 선천개벽들은 아날로그적이고 후천개벽은 디지털적이어서 퀀텀 리프에 비유될 수 있다. 그 결과로 도래하는 후천 지상선경 역시 유불도 등 각 종교들이 꿈꿔왔던 이상향과는 다른 세계로 그려진다.35) 결국 대순진리회 세계관 속에서 존재하는 개벽은 미증유의 대개벽(大開闢)이고, 그러한 상제의 개벽으로 펼쳐지는 후천 지상선경도 요순시대 같은 과거의 고대 이상향과는 다른, 인간이 전혀 꿈꾸지 못했던 세계라고 보기 때문에, 대순진리회의 개벽과 후천 지상선경은 과거로의 복귀나 회복이라는 관점으로 설명되어져서는 안 된다. 개벽과 후천 지상선경을 도래하게 만드는 원리들 가운데 하나인 원시반본이 단군이나 요순시대 등과 같은 과거 시대로의 복귀나 재현으로 해석되어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번째 경우는 특정 시간대 대신에, 과거의 어느 성스러웠던 불특정한 때를 원시반본의 복귀처로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홍범초(1991)는 원시반본을 만물이 시작된 처음 또는 근본으로 되돌려 보내거나 다시 돌아온다는 뜻으로 규정하면서, 천지인 삼계가 파괴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自然更生觀], 만물의 존재 발전 원인과 연원을 밝히고 원류와 연맥을 좇아 원천ㆍ원의ㆍ원형ㆍ원상을 밝혀서 원통과 억울을 풀어 곡해를 바르게 하자는 것[始原復歸觀], 옛날의 도와 법리, 문화를 후천개벽에 다시 쓰자는 것[回歸更定觀]으로 나누어 설명한다.36) 즉 그는 삼계가 파괴되기 이전에 존재했었던 성스러운 가치와 제도를 지향함을 원시반본이라고 본다. 양무목(1996)은 우주 만물의 생명이 도(道)의 근원인 무극의 통일 상태이자 생명의 옛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시반본이라고 해석한다.37)고남식(1997, 1998, 2015)은 과거 황제헌원이 등극했던 시대를 원시로 삼아 반본한다고 보면서, 원시반본의 의미는 최초의 시작을 근원과 원형으로 삼는 것,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 과거의 가치를 재현하는 것,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설명한다.38)윤기봉(1998)은 원시반본을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모든 인간과 신명의 한을 해소시켜 상생이라는 평화공존의 상태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부연하고 있다.39)배규한(1998)은 인간세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한 질서나 체계가 필요한데 그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왜곡되어왔으므로, 왜곡되지 않았던 근원의 세계로 다시 되돌아감ㆍ되돌림으로써 새로운 후천세상을 여는 것이 원시반본이라고 설명한다.40)이경원(1998)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원시반본을 요순시대의 회복으로 보면서도 동시에, 본래의 근본적인 기준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서 이념이나 사상에 있어서의 분열이 없는 단일성을 ‘회복’하려는 것으로도 기술한다.41)
이들의 해석은 인생과 역사 그리고 인간의 모든 현상을 근원적인 최초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본 김형효(1979), 모든 종교의 뿌리이자 원류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본 변찬린(1979)ㆍ윤태림(1980), 분화되기 이전 미분화의 원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한 송호수(1983) 등42) 단군민족주의 입장에 서있는 학자들의 주장과 유사하게 들린다. 이 연구들 역시, 앞선 두 번째 유형과 마찬가지로 대순진리회의 세계관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이 해석들도 종교나 이념이 분화되기 이전의 절대 표준이 되는 성스러운 가치가 과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것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상제께서 펼치진 진리가 유일무이하고 미증유라는 사실을 부정하게 된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선천에 종교ㆍ이념ㆍ사상이 분화되지 않은 무극 상태의 진리가 있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것이 오염ㆍ왜곡되었기에 상제께서 다시 과거 무극 상태의 진리로 그 단일성을 회복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이제껏 존재했었던 천지인 삼계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미증유의 유일무이한 진리를 새로 만드신 것이 상제의 공사이다.43) 원시반본은 과거로의 복귀나 회귀가 아닌,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원시반본을 단순한 복귀ㆍ재현 정도로 보지 않고, 복귀는 복귀이나 창조적ㆍ발전적인 복귀임을 강조하는 연구들도 있다. 원시반본을 복고적인 것도 보수적인 것도 아니며, 특정 이데올로기의 재판(再版)도 아니라고 설명했던 이태호(1983)가 그 최초인 듯하다.44) 그 후 이러한 주장은 대순진리회 내부 연구자들에 의해 줄곧 제기되어왔다. 예를 들어 김화식(1986)은 원시반본을 원시의 시점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원시의 시점에서는 상극의 법칙이 지배했고 다시 원점으로 복귀하는 시대는 관왕시대로서 상극의 법칙이 아닌 상생의 법칙이 지배한다는 해석을 내어놓고 있다. 그러니까 원시반본은 원시로 복귀하는 것이지만, 그 복귀는 이전으로 그저 단순히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복귀’, 상극법칙에서 상생법칙으로의 변화된 ‘복귀’라는 것이다.45) 김정태(1990, 1991)는 앞 절에서 기술했듯이 원시반본을 요순시대의 재현으로 보면서도 동시에, 김화식의 해석과 유사하게 원시반본을 우주의 순환법칙으로도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원시반본이란 생장염장(生長斂藏)으로 순환 반복하는 우주가 성숙을 위해 다시 근본[元始]으로 ‘돌아가야 하고’[返本], 그 반본이란 과거가 아니라 진보적인 것이며, 그로써 곧 우주는 개벽되고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고 한다.46)박승식(1997)은 현재를 우주가 통일운동으로 대전환하는 시대라고 규정하고, 지금은 우주가 생명의 탄생과 분화를 하기 ‘이전의 상태’로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원시반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변화는 과거와 같은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음양합덕이 완전히 이루어진 무극과 같은 상태로서 갈등이나 투쟁이 없는 선경의 시대를 여는 것이라고 말한다.47)조태룡(1998)도 원시반본을 우주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返本]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우주의 처음은 상극 요소를 내재한 세상이었고 이제 원시반본되는 세상은 상극이 극복되고 모든 원한이 다 풀리는 세상이라고 설명한다.48)주현철(2001)도 원시반본에 대한 김화식과 김정태의 해석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49)
이들의 주장을 다시 정리해보면, 순환반복 운동을 하는 우주가 성숙을 위해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게 원시반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되돌아가는 곳은 상극이 지배되었던 과거가 아니라 음양이 합덕되고 발전과 진보를 이룩한 곳으로서 고금의 모든 원(冤)이 풀리고 투쟁과 다툼이 없이 상생으로 완전한 평화가 펼쳐지는 곳이라고 한다.
이 주장은 ‘탄생 → 성장(혼란) → 완성’이라는 진화론적 도식을 활용함으로써 전 절에 소개한 연구들에 비해 대순사상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데 나름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교정되어져야 한다. 창조적ㆍ발전적 복귀가 앞 절에서 살폈던 과거로의 복귀와 성격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복귀’(김화식), ‘돌아감’(김정태, 조태룡), ‘이전 상태로 변화’(박승식)라는 표현에서 살필 수 있듯이 이 연구들은 복귀라고 하는 굴레를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ㆍ발전적 복귀라고 하는 이 해석이 강조하는 것은 우주가 성장ㆍ발전한다는 것인데, 새로움의 구현을 복귀라는 틀에 맞추어 표현하는 방식은 이미 그 자체로 논리적 결함을 안을 수밖에 없다. 새로움은 새로움일 뿐 복귀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성장ㆍ발전했다면 그것은 복귀나 재현, 되돌림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므로, 과거로의 답습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복귀나 회귀, 되돌아감, 재현 등의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표현 문제 외에도 이들의 주장은 순환사관으로 개벽을 해석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순환사관이란 우주가 생장염장ㆍ춘하추동이라는 틀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운행한다고 보는 시간관을 말한다. 원시반본을 이러한 관점으로 해석하는 곳은 원불교다. 원불교는 원시반본을 처음 출발한 근본 원점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이며 우주의 진리가 무시무종ㆍ불생불멸로 무한히 돌고 도는 것을 표현한 말이라고 규정하면서 자신의 종교적 세계를 그려낸다.50) 이것이 증산교에서 말하는 원시반본의 의미와 거의 일치한다는 주장도 있지만,51) 원불교의 해석은 순환사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증산교(정확하게는 증산교본부)의 입장과 다른 대순진리회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상제께서 무위이화(無爲而化) 즉 생장염장의 사의(四義)로써 만물을 주관한다고 말씀하셨으니, 대순진리회는 우주의 운행이 원형이정ㆍ춘하추동이라는 끊임없는 반복, 즉 순환사관에 따른다는 입장이기는 하다.52) 하지만 이것은 우주의 보편적ㆍ일상적 운행 방식이 생장염장ㆍ춘하추동이라는 것이지, 개벽의 도래와 후천 지상선경의 건설이라는 특정한 사건이 원형이정ㆍ춘하추동의 끊임없는 순환반복 속에서 무위이화로 절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 순환사관으로 개벽을 설명하려 든다면, 앞 절에서 정리한 대로 생장염장이라는 순환법칙에 따라 운행하는 우주가 이제 생장(生長)의 단계를 지나 염(斂: 성숙)의 단계로 진입하였고, 우주는 성숙을 위해 근본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는 결국 후천 개벽과 지상선경이 우주의 예정된 프로그램[運數]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임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니까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들의 큰 줄기만큼은 모두 예정되어 있는 것으로서 프로그램의 진행에 따라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극에 의해 지배를 받고, 원한이 천지에 가득 찼다고 할지언정, 예정된 수순에 따라 질풍노도의 세상이 지나고 행복한 미래가 오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에, 일정한 진통은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기만 한다면 자연스레 상극과 원한은 해결되어 나가고 이상적인 세계는 세워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대순진리회의 설명은 이와 다르다. 『전경』에 따르면, 우주가 예상과 달리 일상적인 운행의 틀[常道]에서 벗어나 파국의 길로 치달았고, 이에 놀란 신명들은 구천의 상제께 그 총체적인 위기를 알릴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상제께서 ‘어쩔 수 없이’, ‘괴롭기 한량없으나’ 이 세상에 탄강하시어 천지공사로써 새로운 조판을 짜시게 되었다고 설명한다.53) 또 상제께서는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의 것을 계승함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것이니라.”고 하셨다.54) 그렇다면, 상제의 강세와 천지공사는 생장염장이라는 우주의 보편적 운행 속에서 때가 되면 자연히 무위이화로 전개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해석을 내려야 한다. 적어도 대순사상의 틀 속에서는, 생장염장과 춘하추동의 순환이 일상적ㆍ반복적인 자연의 법칙이지만, 상제의 강세와 천지공사 그리고 그 결과물인 후천 지상선경 건설만큼은 거기에서 벗어난 돌출적인 특별한 사건으로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순환사관과 관련하여 반드시 검토되어져야 할 사안은 대순진리회의 내부 담론인 도서역(圖書易)의 변화 과정이다. 대순진리회는 <그림 1>에서 보듯이 도서역의 용마(龍馬)ㆍ하도(河圖)와 신구(神龜)ㆍ낙서(洛書)를 활용하여, 후천 지상선경의 도래를 ‘봄 → 여름 → 가을’의 순서로 설명하는 교설을 갖고 있다.55) 이러한 교설은 ‘탄생 → 성장 → 성숙’을 해명하기 위해 고안된 상징체계인데,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신 도전께서 1956년에 작성하신 『태극도통감』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꽤 오래된 것이다(<그림 2> 참조).56)
<그림 1>의 ‘봄 → 여름 → 가을’ 도식은 순환사관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춘하추동의 순환적 우주관에 속하지 않는다. 봄 즉 선천개벽 초창기의 인물들로 생각되는 분들은 태호복희나 염제신농, 황제헌원 등이다.57) 이들의 활동기는 시간적으로 대략 5,000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순환사관에 따라서 선천을 봄과 여름으로 보고, 후천을 가을과 겨울로 본다면, 선천이 5,000년이었으니 후천 역시 5,000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대순진리회에서 후천 지상선경은 5만 년으로 상정된다.58) 이 5만 년은 현재의 시간 단위로 계산할 수 있는 한정된 기간을 말한다기보다는, 영원한 세상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쨌든 대순진리회는 후천 지상선경 즉 가을 이후로 도래해야 마땅할 것 같은 겨울과 또 다른 봄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선천 5,000년과 후천 50,000년이라는 시간적 비대칭, 또한 ‘봄 → 여름 → 가을’의 1회 진행으로 완결되며 그 뒤를 잇는 순환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은 선천과 후천이 생장염장ㆍ춘하추동이라는 순환사관의 틀 속에서 벗어난 ‘돌출’임을 입증해준다.
이 외에도 도주께서 밝혀주셨던 「전교(傳敎)」 역시 순환사관에 입각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 있다. 「전교」에 따르면, 황제헌원이라는 성인이 임금이 되면서 시작된 4617년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역사 틀[一元]은 각각 1539년씩인 초통(初統)ㆍ중통(中統)ㆍ계통(季統)으로 나뉜다. 통(統)은 각각 513년씩인 초회(初會)ㆍ중회(中會)ㆍ계회(季會)로 구성된다. 초통의 초회 기간에는 대대로 성인이 임금이 되어 정치와 교화가 일치되었으나, 초통의 중회 이후로는 성인이어야만 임금이 될 수 있는 법도가 사라지고 단지 한 때만 그것이 인정되었다가[聖不承承但一時], 중통에 접어든 이후로는 점점 세상이 쇠미해져서 더 이상 성인이 임금이 될 수 없게 되어 도를 행하지 못하고 단지 가르침만 전했다고 한다[中統由來世漸降 聖不道行但敎傳]. 그러니까 「전교」가 말하는 역사의 반복은 4617년을 한 단위로 하여 ‘회’와 ‘통’이 주기적으로 순환되며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주기는 개벽 이후의 후천에는 반복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후천의 역사 단위는 4617년이 아니라 50,000년을 기본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59) 즉 「전교」는 선천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지, 후천까지 아우르는 메타론적 역사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리하자면, 대순진리회 세계관 속에서 상제의 탄강과 천지공사는 운수[우주 법칙]에 원래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적당한 때가 되어 자연스레 일어났던 일이 아니었다. 대순진리회가 말하는 후천 지상선경은 태초 선천 개벽 때부터 미리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상제의 강세와 천지공사에 힘입어 만들어지는 미증유의 종교적 세계이다. 결국 선천에서 후천으로의 시간적 이행을 되돌림이나 복귀, 돌아감, 이전 상태로 변화, 회복이라는 어구로도 표현할 수 없고 운도론적 순환사관의 틀에 구겨 넣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Ⅲ. 원시반본 개념의 재정립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원시반본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복귀라는 관점 또는 순환사관에 입각해 있다. 이 입장에서 탈피하여 원시반본 개념을 설정하려고 노력한 학자는 김탁(1993)인 듯하다. 그는 원시반본이 증산의 가르침 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그 의의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토로하면서, 해원ㆍ상생ㆍ보은 개념과 연결시켜 원시반본을 살펴야 그 뜻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원시반본이 근본자리를 찾자는 것이고 그 근본자리의 요지는 부모와 조상 또는 천(天)이라고 풀이하면서, 증산의 천지공사에서 종교적 구원의 한 방법론으로 원시반본 원리가 제시된 것으로 본다. 아울러 그는 원시반본이란 개벽시대의 실천정신이고, 과거의 특정 시대와 특정 제도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고치자는 것이며, 후천문화를 이룩할 때 각종 제도와 문명ㆍ문화 등의 외부적 체제는 기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달된 형태 가운데 장점을 취하고, 그것을 운영하는 내부적 체제는 역사의 시원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역사 초창기의 인맥을 활용하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60)
원시반본을 개벽시대의 실천정신으로 파악한 김탁의 견해는 의미가 있다. 더구나 해원ㆍ상생ㆍ보은 개념과 연결시켜 원시반본을 이해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원시반본의 본의를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을 지켜야 하지만 고쳐야 한다거나 혹은 부분만 취한다거나 하는 그의 기술은 일관된 하나의 원리 속에서 표현되지 못하고 있다. 후천의 운영에 역사 초창기의 인맥을 활용한다는 그의 주장 역시 유불선의 종장을 바꾸는 상제의 공사61)를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렇다면 원시반본의 개념은 어떻게 정립될 수 있는가? 앞선 인용문 (A)에서 강성(姜姓)이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 것이나, 신성ㆍ불ㆍ보살의 청원으로 최고의 지고신이 ‘감추어진 신’에서 ‘드러나는 신’으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음62)을 고려한다면, 원시반본은 최고신으로 귀의한다는 신앙적인 측면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반본하는 곳인 원시는 구천의 주재자이자 인신(人身)으로 강세한 강증산인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원시반본의 실제 의미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 글에서는 다음 도전의 훈시를 기준으로 그 개념을 정리할 것이다.
원시반본(原始返本)이란 아주 원시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글씨 그대로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만 돌아가야지 모든 것이 돌아가면 무엇 하겠느냐! 원(原)이란 처음 시작한 거기에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근원(근본) 원(原)을 찾아간다는 것이다.63)
도전께서 내리신 원시반본의 정의는 간명하다. 그것은 ‘근원ㆍ근본을 찾아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전께서는 원시반본이 문자적으로 볼 때 ‘원시(原始)로 되돌아간다[返本]’는 뜻으로 읽힐 수 있지만, ‘되돌아감(returning)’보다는 ‘찾아감(seeking out)’의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바로 그 행간으로부터 과거에 머무른다(되돌아감)는 게 아니라 과거를 확인한다(찾아감)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이제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원시반본에 대한 개념을 추적해보자.
원시반본이 언급되어야만 하는 이유, 즉 근본ㆍ근원을 찾아가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다음의 『전경』 구절은 이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준다.
세계의 모든 족속들은 각기 자기들의 생활 경험의 전승(傳承)에 따라 특수한 사상을 토대로 색다른 문화를 이룩하였으되 그것을 발휘하게 되자 마침내 큰 시비가 일어났도다. 그러므로 상제께서 이제 민족들의 제각기 문화의 정수를 걷어 후천에 이룩할 문명의 기초를 정하셨도다.64)
선천에서는 판이 좁고 일이 간단하여 한가지 도(道)만을 따로 써서 난국을 능히 바로 잡을 수 있었으나 후천에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도법을 합(合)하여 쓰지 않고는 혼란을 바로 잡지 못하리라.65)
상제께서는 삼계 개벽공사로써 후천 지상선경을 이룩하고자 하셨는데, 그 지상선경 문화의 기초는 모든 문화들의 정수들과 모든 도법이 합쳐져 정해지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류 역사에 다양하고 복잡하게 펼쳐진 문화들과 도법들의 정수를 뽑기 위해서는, 그 근본과 시작점으로부터 소급하여 올라가 그 문화들과 도법이 펼쳐진 모든 역사를 빼놓지 않고 다 훑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문화들과 도법들의 근본ㆍ시작점부터 찾아야 하는 것이니, 결국 원시반본은 후천 지상선경 문화의 기초를 놓기 위한 데 그 본래 목적이 있다.
근본ㆍ근원을 찾았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전경』에서 원시반본이라는 종교언어가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원시반본은 후천의 실현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원리로 나타난다. 글의 서두에서 본 대로 (A)에서는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성이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하였고, (B)에서는 원시반본이 되어 군사위가 한 갈래로 된다고 하였으며, (C)에서는 원시반본하니 조상을 부정하는 자들은 다 죽는다고 하였는데, 강성이 일을 맡은 것이나, 군사위가 한 갈래로 되는 것이나, 조상을 부정하면 안 되는 것은 모두 원시반본이 ‘되고’, 원시반본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원시반본은 완결 상태와 중간 과정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로 사용되는 종교언어라고 해야 한다. 결국 원시반본은 고정적이고 정형화된 틀보다는 천지공사의 시작ㆍ과정ㆍ완결을 모두 실을 수 있는 포괄적인 틀, 즉 전체의 과정(process)을 담아내는 유동적인 틀을 활용하여 살펴져야 한다. 아마도 이런 방식은 과정철학적 접근, 혹은 고정된 형식보다는 생성과정을 더 중시하는 역동적 구조주의(dynamic structuralism)66)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틀을 가지고 원시반본의 개념을 정리해보도록 하자. 원시반본 즉 근원(근본)을 찾아간다고 한다면, 근원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 그 일차적인 의미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이것을 사실관계로서의 시작점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관계(事實關係)란 법률용어로서 어떤 것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있다고 할 때, 그 근원을 추적해 올라가서 시작점을 밝히고 그로부터 비롯된 원인과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사실관계를 따진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현상이나 관습, 종교, 문화, 혈통 등을 대면했을 때, 그것의 근원과 근본을 찾아서 그 뿌리와 모태를 파악하고 인정하는 것, 여기에서부터 원시반본의 개념이 출발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A)를 보자. 여기에서는 인간 성씨의 시작이 풍성(風性)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그것이 이어지지 못했고, 그 다음으로 나온 성씨인 강성(姜性)은 지금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개벽시대를 맞아 원시반본이 되므로 상제께서 강성으로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개벽시대는 원시반본이 되므로 현존하는 인류 성씨의 근본ㆍ근원을 찾아 그것이 강씨임을 밝히시고 인신강세의 배경으로 사용하셨던 것으로부터, 상제께서는 어떤 문화 또는 문명의 시작점을 찾으시고 일단 그 사실관계를 인정해주시는 것으로부터 천지공사를 시작하셨음은 분명하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예로는 단주의 원을 들 수 있다. 주지하듯이 상제께서는 세상이 멸망의 경지에 다다른 원인이 상극으로 인해 원(冤)이 쌓인 탓이라고 진단하시며, 해원(解冤)으로써 상생(相生)의 대도를 열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뿌리가 되는 원을 푸심으로써 천지에 가득 찬 모든 원이 풀려나가도록 만드셨으니, 그 뿌리가 되는 원이란 인류 기록의 시작이자 원(冤) 역사의 첫 장인 단주의 원이었다.67) 기록으로 볼 때 최초로 원을 품은 사람이 단주임을 밝히셨던 것은 강씨가 원시성임을 밝히신 것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여기에서도 시작점을 찾아 사실관계를 인정한다는 의미의 원시반본을 읽어낼 수 있다.
사실관계로서의 시작점을 파악하고 인정하는 것이 1차 단계였다면, 그 다음으로는 인정하였던 사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2차 단계가 뒤따라야 한다. 그것은 오직 상제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일인데, 크게 보면 유지ㆍ계승ㆍ사용하는 경우, 철폐하는 경우, 해소ㆍ보수ㆍ수정하는 경우로 나누어지고, 대개 그 모두는 보은의 대상이 된다. 이것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근본(근원)을 유지ㆍ계승ㆍ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원시성인 강씨성을 찾아 인신강세를 위한 가문으로 선정하셨던 (A)의 사례는 지켜져야 할 가치가 있는 시작은 유지ㆍ계승되어야 함을 알려준다. 범주를 확대시켜 보면, 상제께서 김보경에게 본처를 저버리지 말라고 훈계하셨던 일,68) 천연(天然)을 저버린 며느리를 벌하셨던 사건69)들 역시 이에 해당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둘째, 근본(근원)이건만 오히려 철폐하고 없애버려야 할 경우도 있다. 한 예로 상제께서는 “묵은 하늘은 사람을 죽이는 공사만 보고 있었도다. 이후에 일용 백물이 모두 핍절하여 살아 나갈 수 없게 되리니 이제 뜯어고치지 못하면 안 되느니라.”고 하시며 하늘을 뜯어고치는 공사를 보셨던 것70)을 들 수 있다. 묵은 하늘은 곧 지난 과거를 다스렸던 근본이자 시작점이다. 그것은 유지ㆍ계승되거나 보수를 한 뒤 계속 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뜯어서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상제의 입장이다. 묵은 하늘뿐만 아니라 땅을 받들지 않는 관습, 재물과 명예 획득의 잘못됨, 하극상의 사제(師弟) 관계71) 등 여러 가지 잘못된 문화와 법도들 역시 그런 범주에 속한다. 상제께서 종장(宗長)을 교체하신 공사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살필 수 있다.72)
셋째, 근본(근원)을 해소ㆍ보수ㆍ수정해야 할 경우도 있다. 예컨대 앞서 기술하였던 원의 역사의 근본이자 시작점이 되는 단주의 원은 유지ㆍ계승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해소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상제께서 행하신 천지공사의 개요에서도 이것을 살필 수 있다. 상제께서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고 하실 때, 그 모든 방대한 일들을 일일이 하나씩 처결하신 게 아니라 신도(神道)로부터 원을 푸시면서 도수를 굳건히 조화하는 방법을 택하셨다. 말단에 해당하는 작은 일들 하나하나에 매달리기보다는, 그 근본을 찾아 해결하면 인사는 저절로 이룩된다고 보신 때문이었다.73) 이 역시 근본을 찾아 해소ㆍ보수ㆍ수정하는 작업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B)를 빼놓을 수 없다. (B)에서 보듯이 상제께서는 과거에 성웅(聖雄)을 겸비한 성인(聖人)이 임금이 되어 정치와 교화를 아우르는 시대가 있었으나 중고 이래로는 성인이 임금이 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정치하는 자와 교화하는 자가 갈리게 되고, 그로부터 여러 분파가 발생하여 진법(眞法)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러므로 이제 원시반본이 되어 임금과 스승의 자리가 한 갈래로 정립된다고 하셨다.74) 유념할 점은 임금과 스승의 자리가 하나로 되는 것이 원래 참된 것이기에 그 근본을 찾아 유지하는 것이 타당하나, 그것은 형식적인 면에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내용적인 면에서 과거 그대로의 것을 다시 꺼내어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면 보수되어져야 하는데, 상제께서 만드신 후천의 정치ㆍ교화 합일체가 선천의 정치ㆍ교화 합일체와 그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은 그것을 말해준다. 도주께서 밝히신 「전교(傳敎)」에 근거해서, 선천에 성인이자 임금으로서 군사(君師)의 자리를 동시에 점유했던 대표자로 황제헌원과 요순을 들 수 있다.75) 이들은 임금과 스승의 자리를 하나로 하였지만, 황제헌원이 세력 확장을 위해 염제 및 치우, 형천과 크게 싸웠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요순 역시 주변 부족들을 문명화하고 규합하는 과정에서 위무(威武)와 형벌을 사용하여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76) 이것은 상극에 지배되었던 선천의 현실적 한계이다. 후천에는 위무와 형벌을 사용하지 않는 다스림을 편다77)고 하셨던 상제의 말씀을 고려하면, 일방적인 억누름을 내용으로 하는 선천의 임금-스승 자리와 상생이념 및 인존을 내용으로 하는 후천의 임금-스승 자리는 같지 않다. 따라서 상제께서는 정치ㆍ교화 합일체가 하나로 되는 게 참이므로 그 형식은 유지ㆍ계승케 한다고 하셨지만, 그 내용은 과거와는 다르게 하셨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유지ㆍ계승, 철폐, 해소ㆍ수정ㆍ보수의 대상이 되는 근본(근원)은 대개 보은의 대접을 받는다. 근본(근원)이 있다면, 그것의 선악과는 별도로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일정한 가치를 갖는다. 이에 대한 『전경』의 사례로는 문명ㆍ농사ㆍ의약ㆍ부국강병 법술을 출범시킨 복희나 신농, 강태공의 업적을 기려주는 것,78)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공사만 보고 있었던 선천에 대해서마저도 보은을 하는 것79) 등을 들 수 있다. 원시반본이 대순진리회 구원론을 이루는 핵심 원리들 가운데 중요한 축으로 기능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C)를 보면, 상제께서는 “원시반본하는 때라 혈통줄이 바로잡혀 환부역조와 환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셨고, 또 선령신을 섬기지 못하는 자는 살지 못한다는 공사80)를 보기도 하셨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부모가 있고 가문이 있는 바, 그것이 곧 그 인간 개체의 근본이 된다. 상제께서는 조상 선령신들이 쓸 만한 자손을 타내려고 무려 60년 동안이나 공을 들였다고 하셨는데,81) 그 근본적인 이유는 자손의 성공적인 도성덕립으로써 가문 전체가 다 같은 부귀영화를 누리게끔 하고자 하는 데 있다.82)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는 인간 출생이 60년 적공(積功)한 조상 선령신들 덕분이기 때문에, 혈통줄에 대한 부정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선령신을 섬기지 못하는 자는 배은이 되고 결국 살지 못하게 된다고 본다. 이것은 대순진리회 구원론과 수도정신의 주 내용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지금까지 원시반본에 대해 기술하였던 것들을 정리하여 그 개념을 도식화한 것이 <그림 3>이다. 원시반본은 상제께서 천지공사로써 후천 개벽과 지상선경을 여는 데 사용하신 핵심 원리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 뜻은 모든 것의 근본ㆍ근원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근본ㆍ근원을 찾았다면, 그 뿌리와 시작점에 대한 사실관계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 연후에 인정한 것을 유지ㆍ계승케 하거나 사용하며, 때로는 철폐하거나 해소ㆍ보수ㆍ수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는 보은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게 된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상제의 의지와 천지공사로써 처결된다. 그렇게 해서 정제되고 처리된 결과물들은 새로운 진리 체계를 구축하며, 후천 지상선경의 문화를 세우기 위한 기초로 활용된다.
Ⅳ. 닫는 글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원시반본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거의 모두가 복귀라는 관점과 순환사관을 견지하고 있어서, 원시반본이라는 종교언어가 구축해내는 종교적 세계는 과거를 지향점으로 삼는다거나 혹은 우주의 순환법칙에 따라 저절로 구현되는 것이라는 오해를 만들어낸다. 상제께서 행하신 개벽공사와 그 결과물인 후천 지상선경이 운수에 없던 것이자 과거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대순진리회의 관점에서는 이 연구들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원시반본에 대한 기존 연구들이 반드시 재고되어져야만 하는 이유이다.
원시반본에 대한 개념 설정은 복귀와 순환사관의 틀에서 탈피하여 대순사상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야만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글이 제시했던 원시반본 개념을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후천 개벽을 이루기 위한 천지공사의 원리 가운데 하나인 원시반본은 문명ㆍ문화ㆍ도법 등 모든 것의 근본과 근원을 찾아가는 것이다. 찾았다면 그 뿌리와 시작점에 대한 사실 관계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인정했던 것을 유지ㆍ계승ㆍ사용하거나, 철폐하거나, 해소ㆍ보수ㆍ수정하게 된다. 그리고 대개 그 근본은 보은의 입장에서 다루어진다. 이 모두는 상제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며, 이렇게 만들어진 그 결과물은 후천 지상선경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기초로 활용된다.” 복귀 및 운도론적 순환사관을 배제시키고, 역동적 구조주의 관점에 입각하여 단계를 따라가는 유동적인 틀로써 원시반본의 개념을 담아낸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원시반본에 대한 연구들과는 차별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결국 상제께서 구축하신 상생대도의 진리가 미증유, 즉 ‘세계 종교사에 없었던 돌출’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종교적 주장일 뿐 학문적 주장은 아닌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브리콜라주(Bricolage)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개념에 익숙한 현대 학자들은 창조란 단지 기존에 있는 것을 재활용한 것으로서 잡다한 문화 텍스트들이 착종(錯綜)되거나 변형된 것일 뿐이라고 보려는 경향이 강하고, 종교학에도 돌출적인 종교나 문화는 없으며 그 모두는 다른 종교나 문화의 상호 교배, 문화접변(Acculturation)의 결과물인 것으로 보는 시각83)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의 교리 해설 잘못으로 인해 교리를 형성하는 구성요소들 간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착시현상이 생겼다면, 마땅히 그 잘못은 바로 잡혀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순진리회의 교리를 잘못 설명한 오류를 수정하려는 이 연구는 종교적 주장이라기보다는 대순사상의 정립에 보탬이 되고자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한다.
한편 이 글은 대순사상의 고유성만 강조했을 뿐,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하는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그것은 혼합주의나 종교적 포트폴리오(religious portfolio), 관왕론(冠旺論)이라고 하는 주제로써 풀어나갈 것인데, 향후의 숙제로 미루어둔다. 아울러 이 글은 천지공사의 원리라는 측면에서 원시반본 개념을 정리하였을 뿐 본문에서 잠시 언급하였던 신앙의 영역, 즉 ‘최고신에게 귀의’라는 측면에서는 그 개념을 정리하지 않았다. 이 역시 남겨진 과제이다.
글을 닫으면서 필자는 이 글에서 시도했듯이 그 동안 연구되어졌던 대순진리회의 여러 종교언어들에 대한 천착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을 언급해두려고 한다. 대순진리회 사전 발간은 대순사상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큰 숙제 가운데 하나이고, 이를 위해서는 대순진리회의 고유한 종교언어들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 연구들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그들을 종합하여 검증하고, 오류가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원시반본에 대한 탐구는 이에 대한 하나의 사례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향후로도 더 많은 대순진리회 종교언어들에 대한 고찰이 하나하나씩 자세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